배우며

순간, 영원을 잇대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을 읽고

잎새's 2022. 11. 2. 17:04

 



살아 있다는 것은/문정희(2014)

“순간을 놓치는 것은 영원을 놓치며 사는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Horacio의 글을 인용한 "Carpe Diem”는 말을 떠올리게 한 첫 문장.
그리하여 “살아 있는 것은 순간을 파도치는 것”이라는 시구가 탄생된 지점인듯하다.
시인의 젊은 날의 슬픔과 상처 그리고 사랑과 절망을 그대로 담은 시 에세이집.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생활인으로서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시인의 글 앞에

문득, 나를 돌아본다...
part1. 오직, 사랑을 위하여
part2. 다시, 나를 위하여
part3. 비로소, 인생을 위하여



편지(고향에서 혼자 죽음을 바라보는 일흔여덟 어머니에게)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세요
그러나 그것은 생이 아니라 약속이에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 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리들은 조금 나중 그곳에 갑니다
약속도 없이 태어난 우리
약속 하나 지키며 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외롭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어머니는 좋은 낙엽이었습니다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순간마다 착각의 비늘이 돋는 것이다


나무학교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나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 놓을 때
사랑한다! 는 그이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p.109 지성인이란 어떤 가치에 기여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가난하고 씁쓸하고 아픈 대가나 고통을 전제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지성인은 그 가치를 위해 피 흘려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 자체가 바로 가치 있는 지성의 삶이다.

p.250 많은 돈을 가져서 부자유한 경우를 우리는 더 자주 보아왔지 않는가.  가구도 장식도 세간도... 최근에는 책까지도 가볍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중략~  삶을 지극히 단순화시킨다. 나를 매혹하는 일에 거침없이 나를 내어주는 것이 내 자유의 비밀이다.

p.321 미친 듯이 책을 읽고 미친 듯이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리라. 하긴 그 누가 시간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 남은 재고가 얼마인지 그 알 수 없는 목숨의 숙명은, 기실 젊은 사람이나 늙은이를 차별하지 않는다. 언제라도 우리는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처럼 짧은 비명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