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며

시대의 경종같은 부탁 "사소한 부탁"을 읽고

잎새's 2023. 1. 11. 13:18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2018

저자는 고려대 불문학과 명예교수이자 문학평론가. 저서로 <우물에서 하늘 보기><밤이 선생이다><말과 시간의 깊이>등 다수가 있고 옮긴 책으로 <어린 왕자><초현실주의 선언>등 2018년 향년 73세 당낭암으로 타계하시기까지 여러 작품을 저술하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물어왔다. 특히 먼 나라의 문학일 뿐인 프랑스 문학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늘 고뇌해 왔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슬기를 얻게 되었다면 이 질문과 고뇌의 덕택일 것이다. ‘밤이 선생이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 이후에 썼던 글을 묶은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 고뇌의 어떤 증언이기도 다.”며 저자의 말에 남겼다.
이 책이 지닌 무게감 때문인지 도서관 대여 기간, 연장에 연장을 하고서야 완독 했던 책이다.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오하고 분명한 어조의 깊은 통찰에서 나오는 가르침은 문학뿐 아니라 사회, 교육, 정치의 전반에 대한 것이었다.
더 이상 시대와 사상을 아우르는 저자의 통찰을 만날 수 없겠다는 아쉬움을 그의 또 다른 저서 <말과 시간의 깊이>로 대신해 볼 생각이다. 저자의 말처럼 참으로 날카로운 근하신년인 것이다.


p.22 함께 번영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실천하는 지혜가 진정한 앎이며, 한쪽의 동포가 비극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힘이 진정한 국력이다. 거기에서가 아니라면 한 국가의 자존심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p.51 홍어회는 부패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발효의 효과를 이용하여 조리된 음식이다. 우리의 불투명한 내부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이 다른 삶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p.59 말은 그저 말일 뿐이라고 믿어버릴 만큼 편안해진 자신을 넘어뜨리고 한마다 인사말이라도 마음을 다 모아 영접할 준비를 하라고 당부한다. 순결한 학생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를 피와 살로 삼으라고 격려한다. 날카로운 근하신년이다.

p.97 언어는 사람만큼 섬세하고, 사람이 살아온 역사만큼 복잡하다. 언어를 다루는 일과 도구가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글날의 위세를 업고 이 사소한 부탁을 한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

p.118 근대 세계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식민화하기 전에 문명이 자연을, 이론이 삶과 경험을 식민화한다. 근대화와 맞물린 이 식민화는 자연과 사회와 인간의 신체를 단순화하고 표준화해 편의에 따라 재단하고 배열한다. 자연과 인간의 삶은 납작해진다.

p.127 책은 도끼라고 니체는 말했다. 도끼는 우리를 찍어 넘어뜨린다. 이미 눈앞에 책을 펼쳤으면 그 주위를 돌며 눈치를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 그때 넘어진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책이라는 이름의 도끼 앞에 우리를 바치는 것도 하나의 축제다. 몸을 위한 음식도 정신을 위한 음식도 겉도는 자들에게는 축제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p.129 한 지식 체계의 변두리에서는 지식이 낡은 경험을 식민화하지만, 오히려 중심부에서는 지식이 늘 겸손한 태도로 세상을 본다. 제가 무지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에 둘러싸여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다.

p.318 시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시에는 어떤 시이건 ‘시의 만국 공통 문법’ 같은 것이 있다. 그 무심함 속에 만국 공통 문법을 알아본다는 것은 시인이 제 인생을 발견하는 것이나 같다. 말이 시가 되어 날개를 다는 그 순간이 나이 든 한 시인의 등에 저녁노을처럼 섧게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