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추억을 먹는것

잎새's 2022. 9. 22. 15:25

 

 

호박을 썰고 감자 껍질을 벗기는 사람
마음에는 좋은 빛이 비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불 조절을 하는 사람 눈가에는;

기분 좋은 느낌이 붙는다.
그러니 사람의 온기를 나누는 일도 제대로 할 것만 같다.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마음 하나쯤 차려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멀리 간다.
그 그윽함이 오래간다.
내가 뭐 해줄게, 하면서 냉장고 문을 열고,

도마를 꺼내 부엌 조리대 위에 쿵, 하고 올려놓은 사람.
그 이후의 시간을 관객이 되어 즐기는 나 같은 사람.
나의 옆집에도 또 그 옆집에도 그런 친구들이 많이 
어울려 살았으면 싶은 것은 
그것이 내가 믿어보려는 '안녕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병률 / 내 옆에 있는 사람'중에서-

 

 


어릴적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들 대부분,

홀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많이 지으신 친정엄마,
바쁜 중에 명절이면 해주시던 유과, 약과, 송편 같은 음식이다.
비가 내리면 일나가지 못하신 엄마가 그 잠깐의 짬이라도

내어 부지런히 빚어주시던 팥소가 가득든 찐빵은

어린 내게 '엄마의 사랑'같은 것이었으리라.

.
우리 집에는 친지들과 손님들의 방문이 잦았다.
농사일로 힘이 들 법도 한데 집에 오는 손님은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며 꼭 밥상이나 술상을 내오셨고.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결혼초, 
집에 오는 남편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겁도 없이 초대하다 낭패를 보곤 했다.
오랜 직장생활을 접고 사업을 하게 되면서부터 
초대하는 일보다 밖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또 그것에 익숙해지고 보니 
지금은 사람을 초대하는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와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한 끼의 밥을 먹으며 상대방과 소통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까..
내가 모르는 상대방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많은 것이 편해지고 풍요로워진 지금,
허물없이 우리 집에 초대해도 흠이 되지 않고
기꺼이 함께 한 끼의 식사를 나눌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리워진 것은 왜 일까...

 

이 글은 16년도에 올린 글이다

음식에 관한 행복한 기억을 준 나의 친정엄마가 올해로 84세가 되셨다.

늘 바지런하고 솜씨 좋은 엄마는 일복이 많으셨던 분인지라

지금도 현역에서 텃밭을 일궈 각종 푸성귀를 수확한 후

자신의 자식들 입으로 넣어주기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 엄마의 건강이 무탈하여 오래오래 당신손수 지은 푸성귀로

자식들 먹이는 즐거움을 누리시길 바랄 뿐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즐거움 전에 숭고한 엄마의 수고를 생각한다면  

허투로 버려서도 먹어서도 안되는 거였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냉장고 안에 버리는 식자재가 넘쳐나고

쓸데없는 소비로 인한 잔해들이 늘 내 발목을 잡곤 하지만

내 유전 자안에는 바지런하고 정갈한 엄마 유전자가 있어

허술한 살림이지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유지하고 있으니

나는 이 점에서 박 여사님께 고마움을 갖게 된다.

박 여사님한테는 있지만 내게 없는 것,

내 자식뿐 아니라 주위의 많은 이들을 품고 먹이던 큰 손.

난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영역 같다.

나중에야 엄마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은 

자식들이 어디 가서 푸대접받지 않고 귀한 대접받기 바라는

부모 마음임을 늦게야 알았다.

많이 배우지 못하셨건만 엄마는 훌륭한 삶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신듯하다.

일찍 아빠를 여윈 나는 크게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고 자랄 수 있었고

그 중심에 엄마의 고된 노동이 수반되었다는 것을...

오십이 넘어 생각해보니 참으로 쉽지 않은 삶을 걸어오신 분이었다.

그 엄마의 노년이 복되어 무탈하기를 오늘은 오래도록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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