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년이 살던 고려시대나 지금이나 명절은 존재하였고 하여 여인들의 고된 노동은
21세기도 여전하다.
오랫만에 만난 가족들을 위한 노동이라 말하기에 후유증이 크다.
나의 친정엄마나 시어머니의 견해로 보자면 코웃음을 칠 가사노동인지라 어디다 대고
하소연 할 수 없으니 괜히 가족들에게라도 엄살을 부려보지만 근본적 해결은 요원한 현실이다.
남편은 2남4녀중 둘째 아들로 결혼 전, 자신은 장남 따로 차남 따로 생각지 않는다는 둥.
생각해보지 않던 경우의 소리에도 먼 개소린가 했더랬다.
세월은 26년이 흘러 그 소리가 개 소리가 아님을 알게되었으니
때는 이미 늦으리~
큰 며느리인 형님은 오랫동안 맞벌이를 내세워 가족행사마다 빠지기 다반사.
남편과 함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어 나 역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건만 내경우는 예외였다.
특히 명절엔 오자마자 짐싸들고 돌아가기 바쁘신 분인지라
나는 더 이상 내편에 서서 같이 싸울 동지를 잃은 패잔병이나 진배 없었다.
기댈곳이라고는 남편과 나의 두 아이들.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진즉 나가 떨어졌을 것이다.
사람은 바꿔 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씁슬하기 그지없다.
속이 아린것은 변하지 않는 나의 성격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나를 보며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나의 두 언니는 "막내야, 넌 다정도 병이다. 그 순해 빠진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이번 연휴 마지막 날, 맛있는 전어회무침과 함께 한 마디씩 올린다.
그러니 내가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이 문제라고 생각했다가도 '다정도 병'인 나의 병증 탓인가?
싶은 고민에 빠지게 된것이다.
원인을 찾아가다보니 나의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유추해보게 되었다.
4남매의 막내인 나는 어릴적 부터 엄마에게 늘 안쓰러우면서도 기쁨의 대상이였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4학년때 돌아가시고 오랜세월 어린 나를 키우신 엄마에게 기쁨이 되고
싶었던 나는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했다. 학창시절에도 직장에서도 결혼 후 시댁에서조차
그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어쩌지 못한 셈이다.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이니 멘탈관리하며 살아내는수밖에...
추석상차림 후 설겆이까지 마치고 행주를 삶아 밖으로 나오니 보름달이 유난히 밝게
비추고 있었다.
투덜이 스머프가 되어 불편한 심기로 가족들 마음까지 불편하게
않기로 마음 먹으니 주름 투성이 늙은 어머니가 손주를 바라보며 지긋이 웃고 계신다.
나도 나이들어 자식들이 명절에 찾아오면 저런 웃음으로 자식들을 바라보겠지...
동지인줄 알았는데 스파이였고 적군인줄 알았는데 아군으로 내 편이 되기도 한다는
인생의 아이러니들. 한가위 보름달은 다 알고 있다는듯 어는때 보다 환하게 비추고 있다.

'살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너지지만 마라 (36) | 2022.10.11 |
---|---|
추억을 먹는것 (10) | 2022.09.22 |
새로운 시작을 앞둔 너에게 (7) | 2022.08.25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직장편 (0) | 2022.08.22 |
세상에서 어려운 일 (0) | 2022.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