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편지
오랜만에 봄과 눈인사하며 가볍게 나선 산책길에서
노란 수선화와 마주쳤다.
어쩜... 긴 겨울 추위를 잘 이겨내고 이렇게 고운 꽃망울을 피웠구나..
봄의 생명력은
물오른 가지위로 연한 잎싹들의 수줍은듯한 얼굴에서도
이름 모를
색색깔 환하고 가벼워진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3월,
아이들도 개학해서 평상으로 돌아가고
나 또한 새로운 도전 앞에 서있다.
40대 중반으로 접어선 지금
무뎌진 감성과 더 무뎌진 뇌를 깨울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로 한다.
아무런 돌봄을 받지않아도 때가 되면
고운 자태를 품어내는 수선화를 보며
새로운 기운과 용기를 얻는 날.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도서관에 들러 좋아하는 이해인수녀님과
정호승시인의 시집 두권과
김탁환 씨의 책을 대여했다.
산책길에 만난 수선화와
정호승시인이 쓴 <수선화에게>가 묘하게 마주한 날이다.
수선화에게/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여행/정호승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부러짐에 대하여/정호승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았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손택수 <이해인 수녀님의 동백가지 꺾는소리>
어떤 꽃가지들은 부러질 때 속 시원하게 부러진다
가지를 꺾는 손이 미안하지 않게
미련을 두지 않고 한 번에 절명한다
꺾는 손이나 꺾이는 가지나
고통을 가능한 한 가장 적게 받도록
아니, 기왕에 작심을 하였으면
부러지는 소리가 개운한 음악소리를 닮을 수 있도록
아무도 모르는 급소를 내어준다
광안리 성 베네딕도 수녀원
65년부터 여기에 있었다고 얼마 전 영정사진을 찍어놓았다고
암 투병 중인 수녀님이 선물로 동백가지를 끊는다
뚝,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치 오랜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단번에 가지 꺾이는 소리
세상 뜰 때 내 마지막 한마디도 저와 같았으면
비록 두려움에 떨다가도 어느 순간 지는 것도 보람인 양
가장 크고 부드러운 손아귀 속에서 뚝,
꽃보다 진한 가지 향을 뿜어낼 수 있었으며
김탁환 씨는 <혁명><눈먼 시계공><리심, 파리의 조선궁녀>
<불멸의 이순신><나, 황진이> 등과 같은 소설로 알려진 작가다.
그런 그가 5년 동안 매주 15분을 on Air불이 켜지면 책을 소개하고
오롯이 한 책만 파고드는 시간을 가졌다.
이 책은 그 시간의 산물일 것이다.
소설가가 바라보는 소설의 관점...
스물세 편의 소설에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나날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그는 서문에서 지극히 평범한 이웃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부터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당신을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인간다워야 할 때에 그렇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고 열망과 덧없음을 느꼈다고 한다.
열망과 덧없음, 자부심과 경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니
스물세 명의 친구들이 어떻게 막막함을 견디며 자신의 삶과 마주하는지
나 또한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