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가장 가난한 나라, 다른 나라에서 도움을 받아야 했던 나라,
이젠 다른 나라에게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 나의 조국 대한민국.
일본의 역사 왜곡을 보며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생각에 멈춘다.
지금은 고인이된 박완서씨처럼 저자가 아이들에서 발견한 희망이라는
따뜻한 시선이 없었다면 나 또한 이 책을 덮고 싶었으리.
"우리나라 밤하늘은 절대로 암흑색이 아닙니다. 푸른색이 바뀌고 바뀌어
남빛이 되고, 그 다음에는 별이 나타나 반짝입니다." 라는 장조셉신부의 말에
"한국의 밤하늘은 그토록 아름답고 자비로웠다."라는 소신부님의 발견이 정말로 고마웠다.
그런 그의 사랑과 열정이 소년의 집과 중,고등학교 우리나라 최초의 무료 병원인
구호병원, 행려환자 구호소, 서울 소년의집과 무료병원인 도티병원,
필리핀과 멕시코와 같은 해외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할 수 있게 하였다.
6.25전쟁후의 어수선하고 가난하기 그지없던 시절.
1957년 부산의 사제로 부임해 30여년간 한국을 위한 구호사업을 하시다
1992년 3월 16일 만61세 루레릭병으로 핀리핀 마닐라에서 선종하시기까지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14년이라는 긴 세월의 준비 끝에 ,좋은 조건의 부임지를 두고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가장 가난한 나라의 사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들과 같은 가난한 판자집에서 4년 9개월 동안 살았다.
"가난한 생활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사실 생활환경은 사람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가난하게 살다 보면 가난하게 생각할 수 있고, 가난하게 느낄 수 있고,
가난한 이들과 같은 파장 속에 머물 수 있다."(p.248)
때로는 이 나라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검찰총장에게
수많은 아이들이 고아원의 원장과 힘있는 폭력배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항의
해주신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치료도 받지 못해 하루면 20~30명이 죽어나가야 했던 행려병자를 위해 부산과 서울에
진료소와 구호소를 세우지 않았다면 가난한 이들은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엄마가 사랑해>웅이의 상황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먹을것에 애착을 보이며 애어른과 같은 행동을 해야 했던 이유를...
수많은 웅이가 나의 조국에는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웅이는 축복받은 아이였다는 것도...
이야기처럼 들려진 이 책을 나의 딸과 아들이 읽고 어떤 생각을 할 지...
이토록 가난한 나라였던 조국이 이제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지만
우리가 누리는 부는 우리 조상들의 아픈상처와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생이
있었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는냐에 후손들의 삶이 달라 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가난을 물려주지말자. 특히 풍요로움으로 인한 정신적인 가난은...